책으로 읽는 생명과 혁신의 서사

가을은 생명이 완성되고 또 사그라드는 계절이다. 그런 계절에, 생명과 과학을 다루는 세 권의 책을 함께 펼쳐본다.
인류의 역사는 생명과 질병, 그리고 기술이 만들어낸 혁신의 기록이다. 그 과정에서 과학 또한 인간의 한계를 넘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 세 권의 책, 『바이오테크 레볼루션』, 『세계사를 바꾼 10가지 약』, 『RNA의 시대』는 서로 다른 시선으로 ‘생명을 다루는 인간’의 여정을 보여준다.
생명을 설계하는 시대, 윤리를 다시 묻다
『바이오테크 레볼루션(The Genesis Machine)』은 최근 각광받고 있는 합성생물학을 다룬 책이다.
공저자인 미래학자 에이미 웹(Amy Webb)과 합성생물학자 앤드루 헤셀(Andrew Hessel)은 합성생물학이 걸어온 역사와 현재의 기술적 성취를 짚어내며, 인류가 이제 생명을 ‘설계’할 수 있는 시대에 진입했다고 선언한다. 유전자 조작과 인공지능은 질병 치료를 넘어 식품, 에너지, 환경, 군사 등 산업 전반의 혁신을 이끌고 있다.
저자들은 이러한 진보와 함께, 그 이면의 그림자에도 주목한다. 합성생물학은 인류의 수명을 연장하고 고통을 줄이는 기회를 제공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불평등과 윤리적 위험을 가져올 수 있다. 가령 부유층만이 건강한 배아를 선택하고 유전적 결함을 사전에 제거할 수 있는 시대가 온다면, 인간의 존엄은 시장 논리에 종속될 수 있다. 합성생물학이 특정 집단을 겨냥한 생물학 무기로 악용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 책은 기술이 만들어낼 미래를 시나리오 형식으로 풀어내며 독자에게 묻는다. “기술은 이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다. 어디까지 이를 허용해야 하는가?” 저자들은 이미 전 세계가 이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고 말하며, 이제 우리도 그 상상과 토론의 장에 참여해야 할 때라고 강조한다.

질병과 약의 대결이 만들어낸 인류 문명사
인류의 역사는 ‘질병’이라는 창과 ‘약’이라는 방패의 싸움이었다. 『세계사를 바꾼 10가지 약』은 그 치열한 대결의 순간들을 흥미롭게 되짚는다. 동물도 본능적으로 자연에서 약을 찾지만, 인류는 기록과 실험을 통해 약을 발전시켜왔다. 저자는 인류를 치명적인 위기로 몰아넣은 열 가지 질병과, 그로부터 인류를 구한 열 가지 약의 이야기를 통해 질병과의 싸움이 곧 문명의 발전사였음을 보여준다.
책은 단순히 의약의 발전사를 다루는 것을 넘어 ‘만약 그 약이 없었다면 세계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라는 상상력으로 역사를 새롭게 읽는다. 예를 들어 괴혈병을 예방한 비타민 C가 더 일찍 발견되었다면, 영국 대신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이 바다를 지배하는 제국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말라리아 치료제 퀴닌의 발견 시기가 달랐다면, 유럽의 근간이었던 서로마제국의 멸망을 더 빨리 초래했을 것이다. 이렇듯 약은 세계 역사의 흥망과 질서를 바꿔놓는 중요한 계기였다.
『세계사를 바꾼 10가지 약』은 과학적 사실을 역사적 상상력과 엮어낸다. 인류가 어떻게 병을 극복하며 문명을 발전시켜왔는지를 보여주고, 약이 써내려간 인류의 생존 서사를 되새기게 한다.

RNA, DNA의 조연에서 생명과학 혁명의 주인공으로
20세기 후반, DNA가 생명의 비밀을 푸는 열쇠로 주목받던 시절 RNA는 그저 ‘조력자’로 여겨졌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RNA가 단순한 유전 정보 전달자가 아니라 생명을 조율하고 변화시키는 능동적 촉매제임이 밝혀지며, 과학의 주인공으로 떠올랐다.
『RNA의 역사』는 1989년 RNA의 촉매 기능(리보자임)을 발견해 노벨 화학상을 받은 토머스 체크(Thomas Cech)가 자신의 반세기 연구 여정을 담은 책이다.
DNA가 설계도라면 RNA는 그 설계를 실행하는 혁신의 엔진이다. RNA는 정보 저장은 물론 단백질 합성, 세포 반응 조절, 노화 억제 등 생명의 거의 모든 과정에 관여한다. 체크는 RNA의 복잡한 작용 원리를 ‘전축과 LP판’, ‘복사와 붙여넣기 기능’ 등 친숙한 비유로 설명하며, 과학을 모르는 독자도 쉽게 이해하도록 한다.
책은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전 세계를 구한 mRNA 백신, 크리스퍼 유전자 편집, 텔로미어 기반 노화 연구 등 RNA가 이끈 혁신을 소개한다. 저자는 “RNA의 천재성을 이해하는 것이 곧 생명의 미래를 이해하는 일”이라며, RNA가 인류의 다음 세기를 설계하고 있다고 말한다. #
